첫날 화진포 휴게소에서 핸드폰에 관련된 물건은 철저히 현지에 맏기고
차를 갈아타고 출입국 사무소를 넘어 남방 한계선과 북방한계선을 넘는다.
북으로 넘어가면 달리는 도로의 좌우측에는 도로에 접근을 못하도록 휀스가 쳐져있다.
물론 아스팔트 길이고 주로 좌측에 철길이 달린다.
북측의 출입국 사무소에 다달으니 북한측의 환영 노래가 계속 나온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하는 노래다.
우로는 동해의 맑은 바다가 거의 계속 시야에 들어오고
보이는 산은 전부가 바닥의 흙(마사토)이 보이는 민둥산이다.
한편으로는 훤히 주변이 잘 보여서 시원하기도 했다.
북한 초병이 있는 초소를 지나 계속달리는데
차창밖으로 처음 보는 세상이 펼쳐진다.
보이는 농토중의 60% 이상이 밭인 것 같았는데
우리 차량이 지나가는 동안에 우측에 밭에서 일을 하다가 등지고 밭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안내양이 저사람들은 북한군의 청년돌격대요원으로 우리의 방위병에 속하며 복무기간은 3년이란다.
머리는 빡빡 깍고 옷은 감으로 물들인 감색의 옷을 입고 거의 맨땅인(아무런 풀이없는) 밭에 앉아있으니
우리는 죄수인 줄 알았다.
멀리 간간이 보이는 같은 양식으로 지은 마을이 보이고
집은 기와 집으로 멀리서 보기에 우리의 옛 관사같이 약 25~30평 정도의 집에 좌우측으로 나누어 두 세대가 살고있는 듯
들 중간에 붉은 깃발이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여닐곱개씩 꽃혀있고 거기엔 여러명의 일꾼들이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집단농장이었고 깃발은 멀리서 일할 장소를 찾기쉽게 표시한 것 같았고 양쪽 가장자리에 있는 깃발이 그날 일할 량의 한계인것 같았다.
소를 이용하여 논밭을 갈든가 소가 없으면 전부 인력으로 일을하는 것 같았으며 오고가는 중 보인 소는 7~8마리를 본 것 같다.
밭에서 자라는 보리와 밀을 볼 수 있었는데 거름과 비료를 주지못해서인지 포기 밀도와 이삭의 굵기가 너무나 훌빈하고 조그마했다.
우리가 달리는 주변에 별도의 북한 주민이 다니는 길이있고, 길이 만나는 곳에는 초소와 초병이 있었다.
간간이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주민을 볼 수 있었는데 자전거는 우리의 구식이었고 번호판이 붙어있었다.
북한에서는 자전거를 사면 등록을하고 번호를 받아야한답니다.
자전거가 나오던 초기에는 일달러에 아홉대를 살 수 있었답니다. 지금은 얼만지 모르고......
논일은 가까이서 보지는 못했지만 밭일은 남녀노소가 다 같이하는 것을 보았고
개울에는 빨레하는 아낙들이 보였고 아침에는 개울에 나와서 세수를 한답니다.
금강산 지역에 이를 때까지 도로같은 도로를 보지 못했습니다.
주민 중에 어디 멀리 가려면 신고를 한답니다 그러면 배차를 해 준데요.
그러니 넓은 도로가 필요 없는듯 그저 외길로 달리면 되는 정도의 우리 개념의 우마차 길이 있으면 되는가 봅니다.
아예 다닐 필요가 없으니....그리고 휀스 밖에서 운용되는 차는 보질 못했습니다.
학교는 주거지역으로부터 격리된 왼딴곳에 있었고 학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숙사 같은 것이 있었고.
전봇대는 우리가 어릴때 본 것같은 직경 20cm 정도의 굵기에 5m정도 조그만 애자에 양쪽으로 외선의 전선이 깔려있었고
어떤곳에는 우리 팔뚝만한 막대기에 전선이 .....
전선이 우리가 달리는 도로를 건너는 곳에는 남에서 가져간 시멘트 전봇대가 좌우측에 서있지요.
부대라고 생각되는 주변에는 산 비탈에도 밭이 있었는데 그 밭은 아마도 군인들의 자급을 위한 밭으로 생각됩니다.
첫날 낮에는 도착과 동시에 점심 그리고 구룡폭포에 이르는 등산 - 온천욕 - 공연 - 저녁식사
이튿날에는 아침 후 만물상 코스인 망향대 등산 - 점심 - 온천욕 - 복귀
금강산의 산야는 남의 설악산과 별반 차이가 없고 공연은 볼만합니다.
북한의 냉면은 맛이 없었습니다.
오는 날 북측의 출입국 관리사무실을 나오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슬픈 노래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