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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옮긴글)

[스크랩] 사람은 가고 遺言은 남는다

by 최재곤(집시) 2010. 3. 25.

 

[역사 속 名士들의 遺言] 사람은 가고 遺言은 남는다
 

삶의 마지막 순간, 당신은 어떤 말을 남길 것인가? 

 

“죽은 후에도 8시간 정도는 푹 쉬고 싶으니 그 후에 사람들에게 알릴 것.”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사람은 종교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良心을 지켜라. 유언은 필요 없다.”
(2공화국 총리 張勉)

“내가 총에 맞았어!”
(비틀스 멤버 존 레넌)

“맥박이 멈춰선 안돼! 죽음이여! 난 네가 두렵지 않다!”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1세)


[편집자 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올 한해 사람들의 메신저 대화명과 댓글에서는 유독 이 文句(문구)가 자주 보였다.

2009년 2월 16일 故(고) 金壽煥(김수환) 추기경의 善終(선종) 후 3개월 간격으로 盧武鉉(노무현) 前(전) 대통령, 金大中(김대중) 전 대통령 등 지도자들이 흙으로 돌아갔다.

세계적인 팝스타 마이클 잭슨도 6월 幽明(유명)을 달리하는 등 유난히 큰 별이 많이 졌던 한해를 돌아보며 歷史(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名士(명사)들의 遺言(유언)을 살펴봤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7권의 副題(부제)는 ‘악명 높은 황제들’이다. 初代(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지도력이 부재한 로마 제국에 재해와 식량난이 겹친 危機(위기) 시대, 황제 4명의 업적과 恥部(치부)를 다루고 있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악명 높은 황제’는 네로 황제다. 흔히 네로 황제 하면 정신이상자나 폭군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렇기에 “한 예술가가 가고 세계는 혼란스러워지는구나”라는 네로 황제의 유언은 일견 아이러니해 보인다.
 
  많은 사람이 네로가 불타는 로마를 보며 시를 읊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네로는 당시 로마에서 56㎞ 떨어진 악티움에서 휴가를 즐기다 급히 돌아와 慘事(참사)를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지금도 로마에는 네로 황제 시대에 지어진 화려한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가난한 자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테레사 수녀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나 인도 캘커타에 살면서 45년간 빈민과 병자, 고아,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숨을 거두며 그녀가 남긴 유언은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였다.
 
  하지만 타계한 지 10년 만에 발견된 편지 40여 점에는 죽기 전까지 ‘신의 존재’에 대한 그녀의 고뇌가 담겨 있었다.
 
  1979년 12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노벨 평화상 시상식에서 그녀는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이웃들 안에도 있고 우리가 주고받는 미소 안에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벨상 시상식 불과 3개월 전 마이클 반 데어 피트 신부에게 보낸 서신은 이런 내용이었다.
 
  “하느님은 당신을 매우 특별히 사랑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고, 입을 움직여도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 편지는 신의 존재를 체험하고 싶어하는 테레사 수녀의 갈망을 보여준다.
 
 
  “당신 말을 듣지 않고 이렇게 돼 미안해”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이것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의 유언이다. 김 추기경은 선종 직전에도 각막 기증 의사를 전하며 사랑을 실천했다.
 
  2008년 9월 자신의 차 안에서 자살한 배우 안재환은 죽기 전 아내에게 “선희야, 사랑한다” “국민 여러분, 우리 선희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등의 유서를 남겼다.
 
  5월, 폐암으로 숨진 배우 여운계씨는 죽기 직전 남편에게 “당신 말을 듣지 않고 이렇게 돼 미안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남편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암 투병 후 몸을 생각해 연기 再開(재개)를 말렸지만, 아내의 열정을 이길 수 없었다”고 말했다.
 
  떠나는 이들은 가면서도 남아 있는 사람을 걱정한다. 역사 속의 인물들도 마지막 순간에는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찾았다. 미국의 모험 소설가 잭 런던은 죽기 직전 연인 엘리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이 든 소녀여, 난 이제 당신을 혼자 두겠소.”
 
  러시아의 혁명가이자 공산주의 이론가였던 레온 트로츠키는 1936년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대대적인 肅淸(숙청)으로 가족과 거의 모든 측근을 차례로 잃었다. 도피와 망명을 거듭했으나 1940년 8월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 라몬 메르카데르에 의해 등산용 송곳으로 무참히 살해당했다.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수술을 위해 간호사들이 옷을 벗기려 하자, 부인 나탈리에게 말했다.
 
  “그들이 내 옷을 벗기게 하지 마시오. 당신이 내 옷을 벗기기를 원하오.”
 
  이 말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못했다.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썼고 마크 트웨인이라는 筆名(필명)으로 더 유명한 사무엘 클레멘스가 딸 클라라에게 한 유언은 “잘 지내라.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였다.
 
  독일 시인이자 의사였던 고트프리드 벤은 자신의 세 번째 부인에게 “고맙소”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유언장에는 라틴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에게 죽음이 오는 이 순간에도 당신을 보고 싶소. 죽어가면서 내 손이 힘없이 아래로 처지는 이 순간에도 당신의 손을 잡고 싶소.”
 
  독일 제국을 건설한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부인과 일찍 死別(사별)했다. 1893년 여름, 심장과 폐에 발작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기 직전 딸의 손을 잡고 한 마지막 말은 “나의 아이야, 고맙구나”였다.
 
 
  “죽음 따윈 두렵지 않아”
 

데카르트


  누구나 삶의 마지막은 죽음이기에 죽음을 삶의 연속선상에 놓고 보기도 한다. 유언을 통해 본 역사적 인물들은 대부분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또는 그 자체를 인정하고 순응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근세철학자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유명한 데카르트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자, 이제 출발해야지”라고 중얼거리며 다시는 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데카르트와 달리 죽음을 삶의 끝으로 인식한 사람도 있었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의 저자인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유언은 “이것이 끝이로구나. 그리고 니체보(상관없다)”였다.
 

코코 샤넬


  여성 패션의 창시자인 코코 샤넬은 12세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보육원, 수도원을 전전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71년 파리 리츠 호텔에서 컬렉션을 준비하던 중 87세로 死亡(사망)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결국 사람은 죽는구나”였다.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대부분의 작품(그림 900여 점, 습작 1100여 점)을 정신질환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 10년 동안에 창작했다. 그는 생전에 명성을 누리지 못하고, 그가 세상을 뜬 후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고흐는 죽어가며 형제 태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탁이니까 울지 마. 이게 우리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야. 슬픔은 영원히 남는 거야. 나는 이제 집에 가는 거야.”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1세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1세는 난폭하고 교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財政(재정)과 군사제도를 개혁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기에 ‘군인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죽음에 명령한 왕’으로 有名(유명)하다. 맥박이 이미 멈췄다는 의사의 말에 그는 외쳤다.
 
  “맥박이 멈춰선 안돼! 죽음이여! 난 네가 두렵지 않다!”
 
  유럽의 基礎(기초)를 닦아 ‘유럽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크 왕국의 카를로스 대제. 오늘날 프랑스, 독일 군주의 시초이자 로마제국 이후 최초로 대부분의 서유럽을 정복해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일한 인물이다. 그는 죽음이 찾아오자 의사들에게 “나를 그냥 내버려 두게. 당신들의 치료약 없이 그냥 죽는 게 낫겠어”라고 말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역사상 가장 넓은 대륙을 차지한 몽골 제국의 초대 大(대)칸 칭기즈칸의 마지막 말은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잠을 잤구나”였다.
 
  이탈리아의 혁명가이자 건국의 아버지인 주세페 가리발디는 여생을 카프레라섬에서 보냈다. 죽기 직전 그는 “새들을 놔두시오. 그들은 나를 데리러 온 것이오”라는 말을 남겼다.
 
  쿠바의 혁명가 체게바라는 볼리비아 공산당과 지역주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무리한 反(반)정부활동을 벌였다. 결국 게릴라전에서 敗(패)하고 볼리비아의 정글에서 총살되었다. 처형하러 온 마리오 테란 부사관에게 그는 말했다.
 
  “그냥 방아쇠를 당기시오. 당신은 단지 사람 한 명을 죽이는 것뿐이오.”
 

무솔리니


  총을 맞으며 좀 더 격한 말을 남긴 이도 있다. 파시즘의 창시자이자 파시스트당을 조직한 이탈리아의 지도자 무솔리니는 1922년 로마로 진군, 정권을 장악해 이탈리아 왕국을 統治(통치)했다. 美英(미영)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본토로 상륙할 준비를 하자 그는 권좌에서 쫓겨났고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는 9발의 총알을 맞으며 이렇게 외쳤다.
 
  “내 가슴을 쏴라!”
 
  자신이 몇 날 몇 시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이들은 제대로 된 유언을 남기지 못했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1997년 파리 센강 주변의 퐁트달마 터널에서 파파라치의 추격을 피해 과속을 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평생을 파파라치에 시달렸던 그녀는 죽어가며 소방대원 카를로스 자글리아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도대체 뭐가 문제죠?”
 

마릴린 먼로


  파파라치에 시달리다가 간 또 한 명의 사람은 23세로 夭折(요절)한 배우 리버 피닉스였다.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음을 앞둔 의식불명의 상태에서도 자신의 모습이 파파라치에 노출될 것을 두려워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제발, 파파라치는, 파파라치는 안돼….”
 
  그러나 파파라치는 屍體(시체) 안치실까지 들어와 플래시를 터트렸다고 한다.
 
  수많은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던 배우 마릴린 먼로는 1962년 8월 5일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숨지기 3시간 전 침대에 누워 미국 대통령의 처남인 피터 러슨과 통화를 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다시 볼게요. 다시 보자고요”였다.
 
 
  “내 백조 의상을 가져다줘요”
 

비틀스 멤버 존 레넌


  비틀스의 창립 멤버였던 존 레넌은 팬이었던 마크 채프먼에게 1980년 12월 암살당했다. 죽어가며 한 말은 “내가 총을 맞았어!”였다.
 
  비틀스 활동 이후에도 ‘이매진(Imagine)’ ‘러브(Love)’ 같은 아름다운 곡을 써내며 성공적인 행보를 밟던 그가 컴백한 지 한 달도 안돼서의 일이었다. 마지막 앨범 ‘더블 판타지(Double Fantasy)’는 1981년 그래미상에서 올해의 앨범으로 選定(선정)됐다.
 
  비틀스와 함께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앨범을 판 음악가(현재 약 10억 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가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다. 1977년 8월 16일, 자택 욕조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향년 42세로 사망했다. 死因(사인)은 심장마비. 애인이 잠들지 말라고 부탁하자 그는 “오케이, 그러지 않을게”라고 말했지만 결국 영원히 잠들었다.
 
  때때로 유언은 인생의 축소판이자 그 사람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1966년 세계 사이클 챔피언인 영국의 톰 심슨은 1967년 열린 ‘투르 드 프랑스’ 대회 도중 방투 山(산) 비탈에서 탈진했다. 쓰러졌지만 아직 의식은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도우려 하자 말했다.
 
  “나를 다시 자전거에 태워주시오.”
 
  300m를 지나 다시 쓰러진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전설적인 러시아의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가 1931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한 호텔에서 50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폐렴으로 숨을 거두며 남긴 말은 “내 백조 의상을 가져다줘요”였다.
 
  그녀는 15년 동안 유럽뿐 아니라 남미의 소도시, 미국의 작은 마을 구석구석까지 찾아다니며 4000여 회의 해외 순회공연을 했다. 그런 그녀의 유언에서 평생을 발레와 함께한 ‘不滅(불멸)의 白鳥(백조)’다운 면모가 엿보였다.
 
  유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일상적이거나 황당하게 느껴지는 말도 있었다. 뉴욕의 갱 두목 더치 슐츠는 高熱(고열)로 죽어가면서 이런 엉뚱한 유언을 남겼다.
 
  “계산서를 주시오. 난 콩 요리를 주문했소.”
 
  취리히에 있는 한 병원에서 동맥 경화증으로 사망한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은 부인에게 “내 안경을 주시오”라고 말한 후 숨을 거두었다.
 
  딜런 토머스는 1930년대 영국의 대표적 시인이자 ‘술과 인생을 바꾼 시인’이란 평을 들을 정도로 애주가였다. 하루는 그가 과음으로 신음하며 이렇게 말했다.
 
  “18잔의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셨어. 내 생각에 이건 최고 기록인 것 같아.”
 
  혼수상태에 빠진 그는 5일 후 사망했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근대 계몽주의를 頂點(정점)에 올려놓음과 동시에 피히테, 셸링,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철학의 기초를 놓은 프로이센의 철학자가 칸트다. 그는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營爲(영위)하면서 강의에 전념했다. 독신으로 살며 커피와 담배를 즐겼던 그는 1804년 2월 12일 80세로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와인을 마신 뒤 “맛이 좋구나”였다.
 
  예수는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못 박혀 죽어갔다. 그러다 죽음 직전 외친 말이 있었다. 누가복음에서는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누가복음 23장 46절)라 하고, 마태복음에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장 46절)라고 한다. 이를 끝으로 그는 숨을 거두었다.
 
  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인 부처는 BC 560년 태어나 수많은 고행 끝에 얻은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인도의 쿠시나가라에서 죽음을 맞게 되자 그의 주변에 서 있던 弟子(제자)들에게 유언으로 “그대들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부지런히 精進(정진)하여라”라고 말했다.
 

공자


  유교의 始祖(시조)이자 중국의 사상가 공자의 유언은 “지는 꽃잎처럼 그렇게 가는구나”였다. 晩年(만년)에 아들인 백어가 죽고, 사랑하는 제자인 안회와 자로가 잇달아 죽었다. 72세가 되던 BC 479년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말에는 죽음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가 담겼다.
 
  그가 죽기 전에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공자는 제자 자공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련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말문을 닫은 그의 병세는 점점 나빠졌다. 그렇게 7일이 흐르고 숨을 거두었다. 이 때문에 그가 유언을 남겼는지 남기지 않았는지에 대해 이견이 있다. 한편으로는 7일간의 ‘깊은 침묵’ 자체를 유언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에 의해 BC 399년 告訴(고소)되어 감방에서 독배를 들었다. 많은 이가 유언으로 아는 “악법도 법이다”는 사실 마지막 말이 아니다. 그는 죽기 직전 “여보게,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네. 자네가 대신 갚아주게”란 말을 남겼다. 여기서 아스클레피오스는 사람이 아니라 치료의 神(신)으로, 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병이 나면 약과 의술을 주관하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에게 기도를 했다.
 
 
  “강한 자, 내 뒤를 차지하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지 600년 후에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는 망명지 메디나에서 고향인 메카를 향해 칼을 들었다. 그는 아라비아 전역을 종교적, 정치적으로 단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 순간 병으로 인한 고열과 幻影(환영)으로 고통받던 그는 신에게 마지막 청원을 했다.
 
  “알라시여, 나의 死鬪(사투)에 함께하소서.”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들 가운데 하나인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세운 알렉산더 대왕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원인은 잦은 폭음이었다. 바빌론의 한 항구도시에서 5l잔의 포도주를 한 번에 마시고 쓰러져 열흘 동안 일어나지 못하다 죽음을 맞았다. 直系(직계) 후손이 없던 그에게 추종자들이 후계자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가장 강한 자, 내 뒤를 차지하라!”
 
  “내 죽으면 시체를 화장해서 가루로 만들고, 비행기에 싣고 하늘로 올라가서 전 국토 위에 뿌려 달라. 10억의 중국인과 함께 있고 싶노라.”
 
  이 유언의 주인공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정치가 마오쩌둥(毛澤東)이다. 그러나 그의 유언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시신은 방부처리가 돼서 톈안먼(天安門)광장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사살한 후 수감되어 아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천국에 가서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유의 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승훈


  독립운동가 李昇薰(이승훈)은 을사늑약 체결과 고종 강제 퇴위로 정세가 뒤숭숭하던 시기에 한평생 독립운동과 민족의 교육을 위해 봉사했다. 그가 세운 오산학교는 安昌浩(안창호)의 대성학교와 함께 민족 교육의 한 축이 되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렇다.
 
  “내 몸은 묻지 말고 뼈를 생물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만지며 공부하게 하라.”
 
  公炳禹(공병우)는 1938년 한국인 최초로 안과 전문의원을 개원한 의학박사이자 한글 기계화 운동을 펼쳤던 선각자다. 1949년에는 최초로 실용적인 기계식 타자기를 개발했다. 그는 가족에게 “내가 죽은 후에 죽었다고 알리지 마라. 시신은 학생들의 해부용으로 쓰게 해달라”고 유언했고 故人(고인)의 遺志(유지)는 지켜졌다.
 
 
  遺言의 진위
 
  <태평천하>, <탁류>의 소설가 蔡萬植(채만식)은 제자였던 시인 장영창에게 “달구지를 크게 만들어 몰고 다니며 거기에서 炊事(취사)하고 라디오를 틀어 놓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글을 쓰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작곡가 洪蘭坡(홍난파)가 부인에게 말한 마지막 유언은 “숨이 끊길 때까지 베토벤과 차이콥스키의 관현악을 들려주오”였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어린 아이도 다 아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언이다. 적탄을 맞고 숨을 거두며 아군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사람은 없다. 단지 ‘그런 말을 했다더라’라고 신화처럼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물론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다. 최후의 순간, 정말 그들은 ‘그 말’을 했을까.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의 경우를 보자. 문제를 하나 내겠다. 너무나 유명해서 패러디도 많이 되었고, 배신의 관용구로 널리 알려진 그의 유언이 무엇이었는지를 묻는다면 누구나 주저 없이 “브루투스, 너마저!”를 외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답이 아니다. 이 말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나온 말이 와전됐다는 주장이 있다. 또 그가 외쳤다는 ‘브루투스’가 同名異人(동명이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오랫동안 카이사르를 따랐고 제2상속자이자 유언집행인 중 하나로 지명됐던 다른 브루투스(Decimus Junius Brutus Albinus) 말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또 다른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로 하는 쪽이 극적이기에 후대의 입맛대로 유언이 편집됐을지도 모른다. 진실은 카이사르 본인과 칼을 겨눈 브루투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명사들은 죽고 나서도 유명세를 치른다. 死後(사후)에도 종종 그들의 유언은 논란거리가 된다. 盧武鉉(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난 5월 23일 자신의 사저 부근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직전 자신의 컴퓨터에 편지 형식의 遺書(유서)를 남겼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중략)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그러나 이 유서는 자필이 아닌 워드로 작성됐다는 점과 평소의 필치와 다르다는 점 등으로 한동안 타살 의혹, 조작 의혹을 받기도 했다.
 
  “내 원을 밟지 마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죽은 것으로 알려진 아르키메데스의 유언도 진실 여부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와중에 그의 집에 침입했던 로마 병사만이 알 것이다. 無名(무명)의 병사는 과연 자신의 칼에 쓰러져간 老人(노인)이 고대 그리스 최대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며 인류 역사상 위대한 과학자로 손꼽히는 사람임을 알았을까.
 
 
  때로는 가공·조작되기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여인이자 세기의 미인 클레오파트라 7세의 유언을 들은 것은 사람이 아닌 ‘독사’였다고 한다. ‘제왕들의 여왕’이자 로마 지배자 카이사르의 戀人(연인)이었던 그녀는 후에 안토니우스의 부인이 된다. 자식을 위해 고대 왕국을 구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독사가 숨겨진 바구니를 건네받은 그녀는 다가오는 죽음을 체감하며 말했다.
 
  “그래, 네가 거기에 있었구나.”
 
  메로빙거 왕조 최후의 프랑크 왕 다고베르트 1세의 유언은 사냥개가 들었다. 그는 궁내성 장관에게 실질적 권한을 빼앗겨 단 한 번도 진정한 권력을 행사해 보지 못했던 허울 좋은 왕이었다. 사냥으로 소일하다 33세에 병석에 눕자 장관은 모든 권한을 빼앗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외롭게 죽어가던 그는 아끼던 사냥개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진정한 동료였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결국 헤어져야 하는구나.”
 
  가끔은 ‘마지막 한마디’가 가공되거나 조작되기도 하고, 유언은 아니었으되 살아생전 했던 名言(명언)이 유언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의 소설가 버나드 쇼. 유머감각이 탁월했던 그의 유언은 모 통신사 광고를 통해 유명해졌는데 내용은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는 냉소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유언이 아니라 그의 묘비명이 訛傳(와전)됐다는 말도 있다. “죽는 게 웃기기보다 쉽군”이 진짜 유언이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파우스트>로 유명한 괴테의 유언도 논란이 있기는 마찬가지. 1832년 3월 22일 물과 포도주와 함께 덧문을 열어달라고 했던 그는 “좀 더 많은 빛을…”이라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 마지막 말을 들은 사람은 며느리인 오틸리에였으며, 그의 유언은 “네 손을 다오”였다.
 
  “이런! 이런! 너무 늦었어….”
 
  죽어가던 순간에 늦게 도착한 포도주 두 병을 바라보면서 樂聖(악성) 베토벤은 말했다. 그가 “여러분, 희극은 끝났소. 손뼉을 치시오”라는 말을 남겼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聽力(청력) 상실과 건강 악화로 고통스러웠던 삶을 마감했다. 생전에는 들을 수 없었던 음악을 갈망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도 한다.
 
  “천국에서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
 
 
  과학자들의 마지막 말
 

넬슨


  “키스해 주게, 하디.”
 
  이 유언의 주인공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의 해군 제독이었던 넬슨이다. 이 말은 그가 빅토리 號(호)의 船將(선장) 하디에게 한 말이었지만 마지막 말은 아니었으며, 임종 당시 하디는 넬슨 제독의 곁에 없었다고 한다.
 
  넬슨은 전투 도중 탄환에 맞아 왼쪽 어깨, 폐, 척추를 크게 다쳤다. 그럼에도 의식을 잃지 않고 네 시간 동안 지휘를 계속했고, 영국의 승리를 확인하고 숨을 거두었다. 사망 당시 곁에 있었던 빅토리호의 외과의사 윌리엄 베티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 말은 “내 임무를 다할 수 있게 해준 신께 감사드린다”였다. 그는 말을 할 수 없게 되기까지 이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자로 잰 듯 정확할 것만 같은 과학자들의 유언에도 논란은 존재한다.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이론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유언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늘 주목받는 삶에 피로함을 느껴 이렇게 말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죽은 후에도 8시간 정도는 푹 쉬고 싶으니 그 후에 사람들에게 알릴 것.”
 
  유언을 했지만 간호사가 알아듣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세상에서 내 할 일을 다 한 것 같구나”라는 말 역시 유언으로 후세에 알려졌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에세이를 쓰고 있었기에 그가 완성하지 못한 文章(문장)의 첫머리인 ‘인용하자면(Citater fra)’을 유언으로 보기도 한다.
 

다윈


  <종의 기원>에서 생물의 진화론을 내세워 인류사에 충격을 주었던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 그의 유언은 창조론자들과 진화론자 사이에서 오늘날까지도 논란을 낳고 있다. 그는 73세에 심장병으로 사망했는데, 죽기 전 몇 달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기까지는 같다. 그런데 여기서 코미디 프로의 인생극장처럼 그의 유언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갈라진다.
 
  다윈이 사망하기 전인 1882년 “진화론을 否定(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다. 바로 호프 부인. 그녀의 이야기는 미국의 침례교도 신문 <워치만 엑사미너(Watchman Examiner)> 1915년 8월 15일 자에 실렸다. 창조론자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다윈의 가족은 이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말했다. 다윈의 딸 헨리에타 리치필드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 것은 자신이며 호프 부인은 단 한 번도 그를 만난 적이 없다”라고 밝혔다. 호프 부인의 이야기는 창조론자들에게 오늘날까지도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족들이 밝힌 마지막 말은 이랬다.
 
  “나는 죽음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다.”
 
 
  遺言에 관한 有言
 

2공화국 총리 張勉


  遺言(유언)에 관한 有言(유언)을 남긴 이들도 있다. 정부 수립 후 최초 의원내각제 실시, 최초 민주적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 張勉(장면) 전 총리. 20여 명의 친지가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유언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사람은 종교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良心(양심)을 지켜라. 유언은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시인 윤동주의 외삼촌인 독립 운동가 金躍淵(김약연)은 1942년 눈감기 전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내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공산주의의 창시자 카를 마르크스가 남긴 유언은 평생의 동지였던 엥겔스가 들었다. 내용은 이렇다.
 
  “유언이란 살아서 할 말이 별로 없었던 좀 바보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 같네.”
 
  유언은 짧지만 강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음을 맞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지만 유언은 남아 오래도록 餘韻(여운)을 남긴다.
 
  톱스타로 인기절정이었던 30대의 여배우가 있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한 남자. 여자는 자신이 위암 말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고 이별을 결심한다. 남자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까지 그녀의 곁을 지킨다. 둘만의 결혼식, 혼인 신고. 나흘 뒤, 여자는 세상을 떠난다.
 
  한 편의 영화 같은 이 러브스토리는 지난 9월 1일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배우 故(고) 장진영씨 이야기다.

그녀는 위암으로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돼 입원한 터라 유서나 유언을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

만약 그녀에게 유언을 남길 여력이 있었다면 아마 평생의 동반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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